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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사상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by garchive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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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15세기 르네상스미술은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와 직업을 갖고 활동했다.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 벤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인 세를 피에르의 아들이었지만 적자가 아닌 사생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다른 나라들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일반 사생아들은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카타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농사꾼의 딸로, 신분의 차이로 아버지와 공식적인 혼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인체 해부학을 비롯한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 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 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주관과 객관의 조화로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 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 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를 보아주게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그는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대개 5시기, 즉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내(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제2차 밀라노 시내(1506~1513),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로 구분한다.

르네상스 형 만능인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배우 유명한 그림이다. 모나리자는 제1의 밀라노 시내에 스푸마토 형식으로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렸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의 프랑스 틀로 위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가 파묘된 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시스코 멜지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시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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