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루는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고전주의와 대립하는 사상이다.
한편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상이기도 하다. 고전역학이 성공하고 과학이 성장하면서 몇몇 사상가와 시인들이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들의 주장이 호응을 얻으면서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났다. 이들은 인간을 중시하고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연을 분석하지 말고 상상력으로 통찰하라고 주장한다.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난 곳은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과 대륙 철학의 고장이었던 독일이었다. 이 중 영국의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이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죽은 자연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시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인식을 통한 재창조로, 영국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죽은 자연을 살아있는 자연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맥 간은 이러한 인식의 재창조를 하나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당시에 2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오히려 다양한 과학 지식을 섭렵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상, 예술을 형성하게 된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주류 예술이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은 왕족과 귀족의 취향에 맞게 장엄하고 화려한 표현을 추구하였다. 반면에 18세기부터 흔히 부르주아라고 일컫는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들(제3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예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문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제 3계급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예술사조가 주류로 떠올랐는데, 이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과 학문의 경향을 일컬어 낭만주의라고 한다.
낭만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시골의 평화로운 전원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19세기의 유럽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는데, 제 3계급 시민들이 난잡하고 혼란스럽게 공업화가 되어 가는 도시와 반대되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환경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시 유럽의 시골 농부들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의 실제 삶은 척박하고 억압적인 것이었기에, 낭만주의에 담긴 것은 귀족의 아름다운 시골 정원이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영웅과 같이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낭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전통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보다는 즉흥적, 감정적, 공상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 왕정이 복구되면서, 유럽의 정치는 혁명의 열정을 억누르는 동시에 질서정연한 구체제인 빈 체제로 회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 염증을 느끼던 시민 사회의 정열은 문화로 표출되어 감정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역사학에서는 소비자 층의 변화에 주목하는 반면에, 음악사나 미술사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 자신의 주도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창작자 자신의 세계가 없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에 대한 반발로 개개인의 공상 세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생기며, 이때부터 창작자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두 사조가 동일하게 자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두 사조는 같은 자연을 두고서도 그를 이해하는 방식이 상이하였다. 낭만주의의 경우 자연을 억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행동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는 요소들인 종교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의 측면에서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규범적인 표현 형식을 탈피하고 주제도 고전주의적 규범에 의거한 역사, 신화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화가들에게 부각된 것은 광기가 휘몰아치는 광경, 이국적인 전설과 자연의 풍경과 같은 것들이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본적인 생각 속에서 예술가 본인의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조들보다 중요하다. 결국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예술가 개인이고 따라서 개인의 표현이 예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만큼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사조는 없었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백 록적인 성격을 띤 자서전이나 자화상 등을 자주 그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몇몇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시기 자주 그려졌던 풍경화를 자화상의 일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터널의 경우 자기 대표작을 그린 후 "난 단지 이런 장면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 그림을 좋아할 의무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표현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굳이 남들에게 이해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프리드리히도 인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그를 통해서 개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