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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바로크시대 조각가 베르니니

by garchive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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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는 뛰어난 바로크 조각가이자 17세기 로마의 건축가이다.

베르니니는 나폴리에서 매너리즘 조각가인 피렌체 출신의 피에타로 베르니니에게서 태어났다. 7세 때에 몇 개의 큰 사업에 참여하게 된 그의 부친과 함께 로마로 갔다. 거기서 어린 베르니니의 재주는 화가 안으니 발 카라치와 교황 바오로 5세의 눈에 들게 되고, 교황의 사촌이었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그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된다. 그의 최초 작품들은 오래된 헬레니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르게세 추기경 아래에서 젊은 베르니니는 빠른 속도로 그 재능을 드러내었다. 추기경을 위한 초기 작품 중에는 "아기 제우스와 어린 사티로스에 젖을 먹이는 염소 아말 태아"와 같은 정원을 위한 장식적인 작품들과 "저주받은 영혼" 과 "축복받은 영혼"과 같은 우화적인 흉상들이 있다. 22세에 그는 교황 바오로 5세의 흉상을 완성한다.

그는 고전적 엄격성을 지키면서, 유동적 선과 통일적인 중량감을 나타내어, 우아하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며 건축 자체와 작품이 서로 밀접하게 맺어져 있다. 특히 원근법의 효과는 보는 이에게 원근에 대한 환각을 주었다. 성당, 궁전 건축, 조각, 묘묘, 분수, 장식 등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베르니니의 조각적 성과는 막대하고 다양하다. 거의 잘 알려진 조각은 다음과 같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박물관의 코로나로 경당에 있는 "성녀 데레사의 환희", 스칼라 레지와의 기초에 지금은 숨겨져 있는 콘스탄 티네! 가 있다. 그는 두 천사상을 조각하여 산탄젤로 다리의 디자인을 도왔다. 다른 것들은 그의 디자인에 기초해 그의 제자들이 만든 반면에 이 작품은 곧 그가 만든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그가 명성과 권력의 정점에 있던 1665년 4월 말에 파리로 여행하여 11월까지 머물렀다. 베르니니의 국제적인 인기는 그가 파리에서 걸어갈 때 거리에서 찬양하는 군중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예수회의 총장인 올리바 신부가 권장한 이 여행은, 루이 14세가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연속된 요청을 한 것에 대한 회답이었다. 여기서 베르니니는 루브르궁의 동쪽 정면의 디자인을 제안했으나 내국인 클로드 페루의 더 엄격하고 고전적인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의 대담한 오목 볼록한 앞면은 폐기되었다. 베르니니는 프랑스의 예술과 건축보다 이탈리아의 것을 칭송하여 곧 프랑스 궁정의 눈에서 벗어났는데, 귀도 레냐는 그림이 파리의 모든 그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시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은 한 세기 동안 왕실 인물 묘사의 표준을 정립했던 루이 14세의 흉상이다.

베르니니의 건축적 착상들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열주랑 과 광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바르베리니 궁전, 키지 궁전 등의 여러 로마의 궁전들을 설계하였다.

베르니니의 최초 건축 설계안은 청동으로 된 웅장하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제대를 높이 뒤덮는 캐노피인 와 성 비비아나 성당의 앞면이었다. 1629년 가 완성되기 전, 교황 우르비노 8세는 그에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작업의 모든 직무를 맡겼다. 그는 바르베리니 교황을 위한 무덤을 대성전에 설계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와 대성당의 종탑 설계에서의 오판으로 인해 베르니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팜필리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후원이 끊기지는 않은 상태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7세 미지의 임기에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장식하는 데에 다시 중요한 역할을 얻어, 성당 앞부분의 열주랑 과 광장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바티칸으로 향하는 스칼라 레자 입구와 대성당 안에 있는 애프스 안에 있는 성 베드로의 의자 또한 그의 걸작 중 하나이다.

베르니니는 많은 교회들을 무에서 시작해서 짓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한 구조들의 장식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는 이 영역에서 세 가지 임무를 충족시켰다. 그의 고매한 정신은 그에게 분명한 디자인 안에서 구조를 설계하고 내부를 장식할 자유를 허락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작은 타원형 바로크 양식의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이다. 여기에 있는 성 안드레아 조각상은 제대의 틀을 이루는 이디큘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또한 베르니니는 카스텔 간돌포 교회와 아리기와 교회를 설계하였다.

베르니니는 또한 파리에 있는 루브르궁의 열주랑은 짓기 위해 루이 14세에게 고용되었으나, 결국은 건축가 클로드 페루의 설계안에 밀려 거절되고 말았다. 이것은 프랑스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력이 쇠퇴함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클로드 페루의 마지막 설계안은 베르니니의 팔라디오 풍 계단 난간 뒤의 평지붕의 특징을 포함한 것이었다.

바로크의 장식적인 활력이 잘 드러나는 로마 분수들은 공공적인 작품과 교황을 위한 기념물 두 종류가 있는데, 그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한 창조물들이다. 베르니니의 분수들은 트리톤의 분수와 바르베리니 분수이다. 네강의 분수는 웅장한 걸작이자 정치적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분수에 조각된 베르니니의 강의 신 중 하나는 산타 예에 인아 성당의 외관에 실망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 분수는 성당의 외관이 완성되기 몇 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베르니니는 인물상의 돌로 된 침묵에 매력적인 역동성을 빌려옴으로써 대리석 흉상에 또한 변혁을 가져왔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뒤 몬세라트 교회에 있는 페드로에게 푸나 본토야 몬시뇰의 흉상은 틀 바깥으로 몸을 내민 순간적인 동세를 보여준다. 사교적이었던 지휘소로 보르게세 추기경은 그의 흉상에서 대화하는 얼굴이 응결되어 있다. 그의 애인으로 일컬어졌던 콘스탄차 부오나렐리의 초상에서는 신성과 존엄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대신 교제나 놀람의 상황에서 포착한 단정치 못한 사생활의 순간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바깥의 왕실 후원자들을 위한 인물 조각상을 보면, 베르니니는 루이 14세의 인물상에서 어느 면으로 보나 왕의 존엄성을 고양하기 위해 바람을 맞는 대리석 의상과 폭포와 같은 머리카락을 만들어냈다. 이런 조각적인 풍부한 표현은 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일의 흉상도 미화시켜 준다. 그 외에 리슐리외, 잉글랜드의 찰스 1세, 헨리에다 마리아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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