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초상화 화가로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뒀으나, 말년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의 일생 인기가 있었고, 화가로서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20년 동안 그는 많은 중요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가르쳤다.
렘브란트 동시대의 초상화, 자화상, 성경 장면의 삽화는 그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업적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에서 그는 고전적 도상학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그가 자기 경험의 필요조건에 맞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성경 장면의 묘사는 그의 특정 텍스트에 대한 지식, 고전적 구성의 동화,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그의 관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1606년 7월 15일 조이트홀라드주 레이던에서 출생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던대학교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던의 화가인 야곱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던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 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 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울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간은 생활이나 명성에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1634년 명문 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엔 부를 후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1642년의 명작 '야경'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 촬영 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 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으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위해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스키아의 유아 티투스의 성장과, 16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케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16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년에는 헨드리케에게 세상을 떠나고, 16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에칭·소묘로, 종교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풍속화·정물화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혔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 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된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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