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layout-aside-right paging-number">
본문 바로가기
예술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

by garchive 2024. 11. 14.
728x90
반응형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1571년 9월 29일 밀라노에서 태어나 1610년 7월 18일 포르노 에르콜레에서 사망했다.

카라바조의 강렬하고 참신한 작품은 그 자연주의적 특징으로써, 가끔은 거칠기도 한 사실주의로써, 그리고 테네브리즘까지 나아가는 명암기법의 강한 사용으로써, 17세기 회화를 변혁했다. 카라바조는 당대에도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카라바조 주위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카라바조는 수많은 위대한 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카라바조는 1600년대 초반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교양 있는 후원자들 가운데서 작업하며, 카라바조는 화려한 주문을 수주받으며, 자기 작품을 찾는 매우 높은 지위의 수집가들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카라바조는 힘겨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606년, 교황령 재판소에서 여러 분쟁이 있고 나서, 카라바조는 결투에서 상대가 죽을 정도로 상처를 입혔다. 이로 말미암아 카라바조는 로마를 떠나야만 했고, 나폴리에서, 몰타에서, 시칠리아에서 망명 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카라바조는 38세 나이로 사망한 1610년까지, 그 그림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실수를 만회하고자 되팔리곤 했다. 그렇지만, 최근 역사 연구에서는 17세기 사료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퍼진, 더는 신뢰하기 어려운,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카라바조라는 인물상을 문제 삼고 있기에, 그 품행에 관한 전기 상 몇몇 요소는 오늘날 재검토되고 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 잊힌 긴 시기 이후, 카라바조의 천재성이 그의 평판과 독립적으로 제대로 재평가받은 것은 20세기 초가 되고 나고부터였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지난 한 세기부터 여러 소설과 영화에서, 더 나아가 전시회와 셀 수 없는 과학적 저술에서 보여왔는데, 이는 그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현존하는 작품의 수가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의 작품은 현재 전 세계의 가장 위대한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부터 발견된 몇몇 그림에 관해서는 그의 작품인지의 여부가 의문시된다.

카라바조가 1571년 세례받은, 밀라노에 위치한 산도 스테파노 마조레 대성전. 마를 칸토 님으로 달래 석판, 1745년경.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추정하건대 1571년 9월 29일 태어났다. 같은 해 1월에 결혼한 그의 부모는 페르미 메리시와 루치아 아나톨리였으며, 두 명 모두 당대 스페인 통치하에 있던 베르가에 지방의 소도시, 카라바조 출신이었다.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대 카라바조, 카라바조 후작은 두 사람의 결혼 증인이었다. 카라바조는 태어난 다음 날, 밀라노 구역에 있는 산도 스테파노 마조레 대성전에서 세례를 받았다. 밀라노 구역에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가 아마도 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파프리카 델 두오모의 장인이 거주하였다. 세례 증명서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의 대부는 밀라노 귀족 프란체스코 세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하고 명성 있는 측량사였다. 친가와 외가 모두 카라바조 출신이었는데, 중산층에 속했으며 명성이 자자했는데, 일례로 마르칸 토니 오콜론 나의 딸이자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의 아내, 코 스탄 차 콜론 나는 아이들을 맡는 유모로서 메리시 가문의 여러 여인을 보필했으며, 미켈란젤로를 여러 차례 믿고 신용한 후원자였다.

그의 의붓자매, 마르게리타는 1565년 앞선 결혼 전에 태어났다. 카라바조는 1571년에 태어났는데, 이후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보게 된다. 바로 1572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가, 1574년에는 카타리나가, 1575년에서 1577년 사이에는 조반니 피 에트로가 태어났다. 조반니 바티스타는 사제가 되었으며, 밀라노에서 대주교 카르로 보 로메에 의해, 로마에서는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창설자인 필리포 네리에 의해 시작된 가톨릭 개혁을 잘 알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시기 동안 수도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576년에는 페스트가 밀라노를 덮쳤다. 역병에서 탈출하고자 메리시 가문은 카라바조로 피난을 갔으나, 카라바조의 할아버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577년 10월 20일에는 그의 아버지, 뒤이어 남동생 조반니 피 에트로가 감염되는 것을 확실하게 막지 못했다.

1584년, 과부가 된 어머니와 살아남은 네 명의 자식들은 롬바르디아의 수도로 돌아왔는데, 당시 13살이던 카라 바는, 티치아노의 제자로 알려졌으나 화풍은 베네치아풍이라기보다는 더 롬바르디아풍에 가까웠던 시모네 페테르자 노의 공방에 들어갔다. 견습 계약은 4년마다 24에 귀 금화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어머니가 1584년 4월 6일 서명했다.

젊은 화가의 견습 생활은 시모네 페테르 차나 곁에서 적어도 4년간 이뤄졌는데, 그를 통해서 롬바르디아파의 표현력 있는 뤼미니즘과 진실한 세부 묘사의 영향을 받았다. 카라바조는 카피 형제와 암부로 조 피지 노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견습 화가로서 그들의 작업을 밀라노 근교와 근처 소도시에서 배워나갈 수 있었다. 카라바조는 또한 모레도, 사볼도, 로또 모로니시와 티치아노와 같은 베네치아파와 볼로나 파 회화의 걸작들도 관찰했는데, 이는 그곳에서 모두 볼 수 있던 작품들이었으며, 또한 1482년부터 1499년~1500년까지, 이후 1508년부터 1513년까지 밀라노에서 머물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들 역시 볼 수 있었는데, 정도의 차는 있어도 말 조각 설계 등, 다빈치가 여러 차례 머문 발자취들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메리시, 즉 카라바조는 당대 그림 이론, 데생, 유화와 프레스코화 기법을 공부했으나, 특히 초상화와 정물화에 흥미를 보였다.

카라바조의 견습 생활 만년, 1588년부터 로마로 이사한 해인 1592년 여름까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아마도 페테르 차나 곁에서 실력을 갈고닦았거나, 또는 본인 스스로 작업했을 것이다.

728x90
반응형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코코 미술  (8) 2024.11.14
바로크시대 조각가 베르니니  (6) 2024.11.14
바로크 시대의 화가 렘브란트  (8) 2024.11.14
바로크 미술  (3) 2024.11.14
고딕미술  (4) 2024.11.14